조향사 : 향기훈련
끊임없이 향수 성분의 정보를 얻기 위해 많은 냄새를 맡아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다.
향수 제조법은 근본적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때 한창 꽃피웠던 이래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당시에는 식물(방향유, 나무진, 향신료, 나무껍질)이나 동물(사향노루와 사향고양이)등 천연재료에서 추출한 200여 가지 미만의 성분만 이용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 무렵, 유기화학과 합성화학으 발견으로 수많은 신물질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합성 분자도 있고, 천연 복합물에서 유리시킨 순수 화학물질도 있었다. 그 결과 근대 조향의 원료는 전보다 훨씬 풍부해졌다. 더불어 이 원료들을 익히는 일도 더욱 어려워졌다. 조향사는 어떻게 이 모든 원료를 익힐까?
전문 조향사 로버트 컬킨(Robert Calkin)슈테판 옐리네크(Stephan Jellinek)는 이렇게 설명한다. “초보 조향사는 실험실 선반 위에 놓여 있는 낯설고 때로는 불쾌하기도 한 냄새 원료 수백 병에 기가 죽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학생에게는 무수한 냄새 원료의 구별 방법을 배우는 과제가 생각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이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특별한 인지 능력을 연마하는 것, 다시 말해 새로운 정신적 범주와 새로운 냄새를 그 범주에 맞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요령이라고 한다. 이처럼 조향사가 되기 위해서는 냄새 맡는 법이 아니라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훈련의 첫 단계는 이용할 수 있는 성분의 냄새를 배우는 것이다. 프랑스 조향사 장 샤를르(Jean Carles)가 만든 뛰어난 교수법인 ‘지보단(Givaudan)’기법은 연수생들에게 매트릭스 접근법을 이용해 주요 성분을 가르친다. 격자형 행렬을 상상해보라. 각 가로줄에는 향기군, 즉 감귤과 나무 등의 향료가 있다. 각 세로줄에는 교육 일정이 있다. 첫 번째 수업에선 가로줄 방향으로 레몬유, 백단유, 클로브 버드 등 각 향기군의 원료를 냄새 맡는다. 두 번째 수업에는 새로운 표본, 즉 베르가모트유와 삼나무유, 계피유 등의 냄새를 맡는다. 이 과정은 약 아홉 번의 수업을 거쳐 진행되며, 이 과정이 끝날 때쯤 학생들은 향기군 사이의 후각적 차이에 익숙해진다.
그 다음엔 어려운 부분이 찾아온다. 향기군 안의 ‘대비’를 배워야 한다. 이후 수업에선 행렬의 가로줄을 가로지른다. 예를 들어 감귤향 수업 때 학생들은 레몬과 베르가모트, 귤, 밀감, 블러드 오렌지, 그레이프프루트, 라임 냄새를 맡는다. 수석 조향사이자 교사인 르네 모르겐탈레르(Rene Morgenthaler)에 따르면, 이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이 각 성분에 대해 자신만의 인상을 갖게 하는데 있다고 한다. 자신만의 인상을 갖는 것은 향수를 만드는 데 있어서 필요한 섬세한 차이를 기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후각 훈련소 졸업생은 100가지 이상의 천연재료와 150여가지 합성물질을 구분해야 한다. 전문 조향사는 자기 회사의 자료실에 있는 500~2000가지 재료 모두에 익숙해지고 각각의 등급을 인식할 수 있다.
기본 원료를 염두에 둔 훈련생은 그 다음엔 조향사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전문가는 향수를 분석하거나 새로운 향을 만들 때 개개 성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조화라고 하는 전형적인 결합에 대해 생각한다. 조화는 특히 잘 어울리는 원료들(15가지가 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의 혼합이다. 조화는 향수 제조의 기본 원칙이다. 조향사는 여러 가지 조합을 통해 ‘골격’이라고도 하는 향수의 기본 스케치를 만든다. 어떤 면에서 향수를 만드는 건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과 같다. 프로그래머는 이미 많은 코드가 담겨 있는 기본 소프트웨어 모듈로 시작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많은 모듈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향수는 조화로 만들어진다. 비슷한 점은 또 있다. 소프트웨어를 반복적인 디버깅으로 테스트하는 것처럼 향수는 거듭해서 냄새 맡고 제조법을 조금씩 바꾸면서 테스트한다.
향수 제조처럼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예술 형태는 컴퓨터화하지 못하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사실은 그 반대다. 향수 제조 업계는 재료를 찾아내고 제조법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세계에 빠르게 적응했다. 무수한 성분을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컴퓨터 기술 덕에 줄어든다. 조향사는 회사의 모든 재료 목록을 컴퓨터로 검색한다. 그리고 마우스를 계속 클릭하여 제조법을 조합한다. 제조법과 실패한 실험, 좋아하는 조화 등 모든 것을 저장한다. 소프트웨어는 창조 과정에 있어서 적극적인 파트너가 된다. 소프트웨어는 화학적으로 조화롭지 않은 두 재료가 선택되었을 때 사용자에게 경고하거나,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변색될 수 있는 제조법을 피하게 한다. 그뿐 아니라 계속해서 제조법의 비용을 기록하여 향유 1파운드당 가격을 화면에 표시한다. 특정 프로젝트의 창조적인 허용 범위가 얼마나 넓든, 조향사는 언제나 금전적인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일단 초보자가 조향사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면 냄새 맡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개개 성분은 희미해지고 전체적인 향기가 나타난다. 나무 이전에 숲 냄새를 맡는 법을 배운다. 새로운 남성용 향수 냄새를 맡으면 빠르게 푸제르(Fougere, 향수업자들이 만들어낸 말로서 신선한 라벤더 향 및 이끼 향 노트가 조합된 향을 일컬음) 향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 다음 푸제르 패턴의 특징인 라벤더, 파촐리, 오크나무 이끼, 쿠마린 등 개개 노트(Note, 향수가 시간에 따라 여러 가지 향을 내는 단계)의 냄새를 맡을 것이다. 이를 확인한 후 더 나아가 이 제조법을 다른 모든 푸제르와 구별 짓는 특별한 비법이나 미묘한 차이를 찾아 냄새 맡는다.
조향사는 복잡한 세계를 다루기 쉬운 소수의 향기군으로 정리한다. 유명한 조제법을 사용해 향수 창조 과정을 단순화한다. 조향사의 임무는 원료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패턴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의 정신적 지도는 자주적인 세부 사항으로 정돈되어 있다. 대부분이 창조적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조향사는 약간 미치광이 같은 성향이 있다. 하지만 무수한 냄새를 기억하기 때문에 미치는 것은 아니다.